[정갑영 칼럼] '기술 냉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입력 2019-08-11 17:40  

일본 갈등 전에도 침체 거듭해온 한국
인기영합 복지정책과 정략적 선동 앞서
투자환경 개선·전문인력 양성에 힘써야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前 총장 >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일본의 수출규제까지 겹쳐 온 나라가 시름으로 가득하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관세와 기술을 넘어 환율전쟁으로 확산됐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강행을 앞둔 유럽연합(EU)에서도 암운(暗雲)이 몰려온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 안보 불안까지 겹쳤으니 수출주도형 한국 경제가 사면초가에 직면한 셈이다. 일부에서는 ‘죽창’이란 말이나 반일(反日)을 거론하며 애국심을 부추기지만 울분과 격정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수입처 다변화나 부품 국산화도 하루아침에 가능한 게 아니다. 자력갱생의 장벽이 너무나 높다. 남북한 ‘평화 경제’의 꿈은 더욱더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지금은 감성이나 즉흥적 발상에서 벗어나 일본과의 갈등을 완화하고 확산을 막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전문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외교적 정상화를 모색하고, 이번 기회에 극일(克日)을 넘어 치열한 기술냉전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가다듬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경제는 일본의 수출규제와 무관하게 지난 수년간 침체를 거듭해 왔다. 대표적 경제지표인 주가지수(KOSPI)만 살펴봐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주까지 15.5% 하락해 주요 20개국(G20) 중 가장 부진한 성과를 나타냈다. 한국 경제는 한때 ‘아시아의 호랑이’로 기적과 같은 성장을 구가했지만, 지금은 경쟁력의 원천이 됐던 그 많은 요인이 모두 취약해지고 있다. 대외 수출환경이 악화되고, 노동시장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효율적인 시장 친화 정책과 혁신적 기업가정신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런 여건에서 어떻게 지속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현 정부가 기치로 내건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도 여전히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형평과 공정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구조조정기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정책 목표의 달성은커녕 분배를 악화하고 잠재적 성장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부작용만 확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복병을 만났으니 성장동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큰 난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일본의 수출규제가 세계적인 기술냉전 추세를 좇아 한국의 첨단산업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추진된다면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 행여 일본과의 통상관계가 단기에 호전된다고 해도 차세대 첨단산업에 대한 규제는 어떤 형태로든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결국 한국에 대한 투자 환경을 악화시키고, 미래 산업의 잠재적 성장 기반을 위축시킬 것이다. 이미 최저임금과 법인세 인상, 환경규제 등으로 외국인의 국내 투자는 급감하고 있다. 오히려 해외 투자가 급증하는 최근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한국 경제의 불길한 예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치열한 기술냉전에서 살아남아 한국의 미래를 담보하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은 세계 각국의 실증적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 아일랜드처럼 투자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첨단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거나, 싱가포르처럼 교육과 고급 인력에 과감히 투자해 경쟁력을 제고하는 방법이 있다. 미국처럼 세제와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자국 기업을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도 있다. 동시에 인기에 영합한 복지정책과 정략적 선동으로 실패한 사례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델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번 계기에 한국이 어떤 체제를 지향하며 비전과 목표는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정책 기조를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 방향은 명약관화하다. 우선적으로 투자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첨단산업을 이끌 전문 인력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소재와 부품에 수조원을 퍼붓는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길러지진 않는다.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산업 규제,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개선하지 않은 채 시장에 역행하는 정책을 지속한다면 ‘극일’은커녕 장기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기조차 힘들 것이다. 죽창을 들고 외부 탓만 하기 전에 우리 내부의 제도 혁신이 가장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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