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농담에 욱하기도
애물단지 된 일본차
"밖에 끌고 나가지도 못해"
[ 김형규 기자 ]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과 미·중 무역전쟁 등 해외에서 생긴 악재 탓에 산업 일선의 김과장 이대리들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일본이 지난 2일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한 데다 미국이 5일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등 대외 리스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반일 감정이 크게 확산하면서 일본 관련 사업을 하는 김과장은 업무가 ‘올스톱’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주가 급락으로 울상을 짓는 이대리도 있다. 여름 휴가철이지만 해외여행도 쉽지 않다.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터라 일본 여행은 눈치 보이고, 원화 가치가 급락한 탓에 다른 국가를 여행하기에는 금전적으로 부담되기 때문이다. 해외 악재가 직장인들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日 관련 직장인들 ‘비상’
일본과 관련한 업무를 하는 직장인들은 요즘 비상이 걸렸다. 일본 여행 전문업체에서 근무하는 김 대리는 요즘 먹고살 걱정이 앞선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이후 여행 수요가 뚝 떨어졌다. 회사가 일본 여행을 전문으로 다루는 데다 영세업체여서 “이러다가 회사가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나”란 생각까지 든다. 통상 7~8월은 패키지 상품 고객이 몰리는 시기지만 최근엔 비수기만도 못하다. 사내에서 대책 회의도 여러 차례 열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반사이익을 보는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생리대를 판매하는 한 중소기업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구 과장은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다. 경쟁 상품인 일본 생리대들이 불매 제품 리스트에 오르면서 국내 유통업체들이 국산 생리대 구매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컬래버레이션을 하자는 업체들의 문의도 빗발친다. 구 과장은 “몸은 바쁘지만 올해 부서 실적이 좋을 것 같아 뿌듯하다”며 “다만 언제까지 불매운동이 이어질지 몰라 생산량 확대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으로 오해받아 속앓이를 하는 직장인도 있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롯데 계열사에 다니는 정 대리는 마음이 불편하다. 롯데가 일본 기업으로 잘못 낙인찍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매출과 고용 인원이 일본 롯데보다 25배 이상 많은 한국 기업인데도 일본 기업으로 오해받고 있다. 지난주 서울 중구청이 ‘노 재팬(No Japan)’ 깃발을 건다는 소식을 듣고 입사 동기들과 “출근할 때마다 노 재팬 깃발을 보면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외부 모임 참석도 자제하고 있다. 최근 대학동기 모임에 갔다가 “너네 회사 일본 기업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장난으로 툭 던진 말이었지만 괜히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석 달 전에 일본 차 샀는데…
일본 제품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은 주위 눈치 보기 바쁘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정 대리는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석 달 전인 지난 5월 도요타 자동차를 샀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새 차를 도로에 끌고 나온 날보다 주차장에 둔 날이 더 많았다. 팀장이 일본 자동차를 샀다며 팀원들 앞에서 뜬금없이 ‘디스’를 한 다음부터다. 정 대리는 “차를 살 당시에 이런 분위기였다면 당연히 다른 브랜드를 구매했을 것”이라며 “새 차가 아깝지만 분위기가 잠잠해질 때까진 이용을 자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일본 닛산 중형차를 타는 신 차장은 매번 지하주차장만 찾는다. 지나친 반일 감정으로 일본 차량에 대한 ‘테러’가 기승을 부린다는 얘기를 듣고나서다. 밖에 주차했다가 아끼는 차가 상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집은 물론이고 회사든 영업처든 주차비를 감수하고라도 지하주차장에 꼭 차를 대놓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반일 운동에 ‘지나친 열의’를 보이는 상사들 때문에 힘들다는 김과장 이대리도 있다. 서울 한 출판사에 다니는 김 사원은 최근 카카오톡 프로필에서 반려견 사진을 삭제했다.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우리나라 토종개인 진돗개와 삽살개가 있는데 왜 일본 견종인 시바견을 키우냐”고 핀잔을 준 게 마음에 걸렸다. 김 사원은 “강아지가 무슨 죈가 싶어 황당했지만 괜히 구설에 오를까 봐 사진을 내렸다”고 털어놨다.
주가 하락에 눈물
연일 계속되는 대외 악재에 직장인의 대표적 재테크 수단인 주식도 크게 출렁이고 있다. 소폭 반등하긴 했지만 코스피지수는 최근 한 달 새 6% 이상 떨어지면서 글로벌 주요국 증시 가운데서 상황이 좋지 않은 편이다.
출판사에 다니는 이 과장은 생애 첫 내집 마련을 앞두고 일본의 경제보복 탓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팔아 계약금 7000만원을 내려 했지만 계약을 며칠 앞두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소식에 주가가 속절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보유 주식의 평가금액은 며칠 새 30%나 날아갔다. 시간이 지나면 오를 것이란 생각도 있었지만 계약일이 임박한 까닭에 눈물을 삼키고 전량 팔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을 향해 분노하면서 부족한 계약금은 적금을 깨 메워야 했다.
원화가치 하락에 해외여행 부담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해외여행을 가는 데 부담을 느끼는 직장인도 많아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년 전 달러당 1120원대에서 최근 1210원대로 100원 가까이 올랐다. ‘가성비’ 좋은 여행지인 일본은 한·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기피 지역으로 바뀌었다. 국내 여행을 가려 해도 성수기 요금이 겁나 집에 머물거나 호캉스(호텔+바캉스)로 휴가를 대신하는 분위기다.
공공기관에 다니는 정 팀장은 최근 일본 여행을 취소했다. 석 달 전에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잡아놓은 골프여행이었다. 이런 시기에 갔다가 “사회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일본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부담스러웠다. 골프 일정을 포함해 4인 기준으로 여행 상품에 가입해 자신이 빠지면 전체 일정이 어긋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 팀장은 “4인 기준 여행이라 한 명만 취소하기도 어려워 친구들에게 나를 빼고 그냥 가라고 했다”며 “돈도 돌려받지 못하고 휴가를 나홀로 보내게 됐다”고 털어놨다.
여행에 다녀와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대기업 지주사 임원인 이모씨는 가족과 함께 일본 삿포로로 여름 휴가를 간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회사가 ‘애국 마케팅’의 불을 지피는 와중에 일본 여행을 갔다는 게 소문나면 회사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데다 다음 임원 평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그는 가족에게 여행사진을 절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