円 약세 사라지자 日경제 '비틀'
[ 김동욱 기자 ]
2013년 이후 일본 경제를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던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가 최근 들어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엔화 가치가 치솟으면서 일본 경제가 타격을 받는 와중에, 한국에 무리하게 경제보복을 가하면서 일본 경제의 침체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4일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에 따르면 일본은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목표치를 0.7%로 잡고 있다. 올초 잡았던 목표치(0.8%)를 지난달 30일 0.1%포인트 하향 조정한 것이다. 이마저도 일본 민간 경제연구소들의 전망치 평균(0.5%)에 비하면 크게 낙관적이라는 지적이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0.7%에 이어 올해도 0%대에 그칠 것이 확실시된다는 분석이다.
아베 총리가 집권한 2012년 말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크게 회복됐다. 2013년엔 2.0%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연속 0%대에 그치면서 아베노믹스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축을 이루던 엔화 약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한때 달러당 125엔대까지 떨어졌던 엔화 가치는 최근 달러당 105엔대를 위협할 정도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 영향으로 각종 경제지표는 악화하고 있다. 올 상반기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87.4% 감소한 2242억엔(약 2조5578억원)으로 떨어졌다. 기업 실적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일본 증시에 상장된 1243개사의 올 2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4% 감소하며 세 분기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여기에 아베 총리가 한국에 경제전쟁을 선포해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는 등 일본 경제의 침체 골이 깊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엔화가치 급등·G2 무역전쟁에 수출 둔화·제 발등 찍은 韓·日 마찰
“‘아베노믹스’가 6년 넘게 시행되는 동안 일본과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격차는 1.38배에서 2.47배로 확대됐다. 일본을 대표하던 도시바,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재팬디스플레이는 모두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쇠퇴했다. 세계 경제에서 일본의 지위가 저하됐다는 것이 아베노믹스의 참모습이다.”
일본의 원로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가 최근 경제전문지 겐다이비즈니스에 낸 기고문이다.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미·중 무역분쟁과 엔고(高) 여파로 아베노믹스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일 경제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진단했다.
부러진 ‘엔화 약세’ 화살
아베 총리가 2012년 말 집권 이후 시행한 아베노믹스는 ‘세 개의 화살’로 불리는 △금융정책 △재정정책 △성장정책이 핵심이다. 이 중 ‘첫 번째 화살’인 금융정책은 ‘대담한 통화정책을 통한 양적완화’가 골자다. 초반엔 효과를 나타냈다. 무제한 돈풀기 덕에 2010~2012년 달러당 80~90엔 선을 오가던 엔화 가치는 2015년에는 125엔 선까지 떨어졌다. 아베노믹스 전과 비교하면 10~25%가량 떨어졌다. 장기간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수출경쟁력을 강화한 제조업을 중심으로 기업 실적이 개선됐고 이는 고용 확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올 들어 아베노믹스를 지탱해왔던 엔화 약세라는 가장 중요한 기둥에 금이 뚜렷이 간 모습이다. 올 5월 달러당 110엔 선을 밑돌기 시작한 엔화 가치는 이달 5일에는 한때 달러당 105.80엔까지 치솟았다. 엔화값은 최근 4년간 15% 가량 뛰었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안전자산 쏠림현상이 지속돼 엔화 강세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세 꺾인 일본 수출
엔화 약세 기조가 갑작스럽게 끝을 맺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 기업들은 당황해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엔화 가치가 1엔씩만 올라도 도요타자동차는 연간 400억엔(약 4559억원), 닛산자동차는 110억엔(약 1253억원), 히타치제작소는 25억엔(약 284억원)의 영업이익이 감소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주요 상장기업은 올해 달러당 109엔을 상정해 경영계획을 짰다. 노무라증권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09엔에서 105엔으로 오르면 일본 증시 상위 300개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이 1.44%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엔화 강세는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탄탄대로를 걷던 일본의 수출에도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올 상반기 일본의 수출은 38조2417억엔(약 436조원)으로 5분기 만에 30조엔대로 쪼그라들었다. 수출의존도가 30% 안팎인 일본 경제가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를 직접 받은 결과다.
이처럼 수출이 둔화하면서 무역흑자 규모도 급감했다. 지난 8일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일본 상반기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87.4% 감소한 2242억엔(약 2조5578억원)에 불과했다.
최악의 시점에 한국 공격 ‘자충수’
대외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시행한 것도 일본 경제를 둘러싼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일본 경제에 자충수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소재·부품산업에서 예상되는 수출 차질 외에 한국 내 일본상품 불매 및 일본여행 자제 움직임에 의한 타격도 적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47%인 240만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방문했던 규슈 지역에 한국인 방문이 크게 줄면서 지역경제가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키나와의 한 호텔은 10월 한국인 관광객 예약 건수가 전년 대비 90% 감소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한국의 관광 불매운동 여파로 내년 일본 경제성장률은 0.1%포인트 떨어지고 고용이 9만5785명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아베노믹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2년 말 집권 이후 펼치고 있는 경제정책. 20년간 이어진 경기 침체를 해소하는 것이 목표다. 금융 완화, 확장 재정, 규제 완화를 비롯한 성장정책 등 이른바 ‘세 개의 화살’을 정책 도구로 삼았다. 2020년까지 명목 국내총생산(GDP) 600조엔 달성, 10년간 평균 명목성장률 3% 달성을 내걸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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