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아 꿈꾼 70대 화가의 열정…인도네시아서 '수채화 한류' 개척

입력 2019-08-15 17:48   수정 2019-08-16 00:28

컬처人스토리 - 한국 수채화 대가 정우범 화백

자카르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내년 1~2월에 대규모 회고전



[ 김경갑 기자 ] 한국 수채화의 맥을 잇고 있는 정우범 화백(73)은 40대 초반에 ‘평생 그림만 그리고 살겠다’고 선언했다. 광주교대부속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조선대 교육대학원에서 그림을 익혀 전업화가 길로 들어선 건 1987년이다. 젊은 시절 닦은 기예와 기량을 펼치고 싶은 욕망도 작용했다.

미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들을 따라가려면 하루에 10~15시간은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간과의 싸움을 벌였다. 공허함으로 가득찬 무(無)의 세상 속에서 생명력으로 반짝이는 유(有)를 갈망했던 그는 1990년대 초 태권도 박사 이기정 씨와의 인연으로 미국 올랜도시티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 ‘수채화 한류’에 도전장을 냈다. 미국 워싱턴DC 미셸갤러리(1995년)를 비롯해 대만 쑨원미술관(2017년)과 중국 상하이 인근 우시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2018년)에 잇달아 초대되며 국제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정 화백이 이번엔 동아시아의 심장부인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저력을 뽐낸다. 자카르타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서 내년 1월 7일~2월 3일 회고전을 펼친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정 화백은 ‘코리아 환상곡’을 주제로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채집한 야생화를 반추상 기법으로 작업한 대작 50여 점을 걸 계획이다.

15일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난 정 화백은 자카르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여는 것에 대해 “복숭아꽃 향기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꽃잎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무릉도원을 한국적 감수성으로 화폭에 수놓은 게 주목받은 것 같다”며 “미술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정 화백은 지난 40년 동안 수채화 길을 우직하게 걸어왔다. 전통 수채화 기법을 고수한 그의 작품들은 50대 초반까지도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2002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수채화에 아크릴을 혼용한 꽃그림 ‘판타지아’ 시리즈를 내놓았다. 터키 수도 앙카라로 스케치 여행을 하며 케말 파샤 광장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 천지를 화폭에 담았다. 국화를 비롯해 장미, 팬지, 양귀비, 피튜니아 등 형형색색 원색의 꽃들을 화면에 빼곡히 채운 ‘판타지아’는 수많은 미술 애호가를 열광시켰다. 최근에는 캔버스를 꽃밭으로만 채우면 지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각형과 사각형 등 기하학적 요소나 글자 형태로 꾸민 ‘문자 판타지아’에 매달리고 있다.

국내는 물론 국제 미술계가 정 화백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어떤 작은 꽃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귀중하다’는 이상향에 대한 미의식을 동양 특유의 번짐과 스밈 화법으로 시각화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정 화백은 “거대한 꽃 무더기를 통해 무심(無心), 힐링, 평화, 행복을 풀어낸다”며 “전통적인 수묵화의 발묵(發墨)과 파묵(破墨)을 현대적인 수채화에 응용한 점에서 국내외 화단의 각별한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화백의 화법은 유별나고 독특하다. 프랑스산 고급 수채화용 종이인 아르슈지에 물을 적신 뒤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붓 끝에 안료를 발라 종이에 두드리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놓고 시간이 지나면 물감이 자연스럽게 번진다. 물과 물감, 종이가 서로의 영역을 침투하고 침투당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색채끼리 저절로 만나 어우러지면서 마치 꿈속 장면인 듯 아련하면서도 오묘한 아름다움을 품은 화폭이 탄생하게 된다.

정 화백은 작품 제작 방식에 대해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끝없는 반복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는(+) 것 외에도 미처 캔버스에 스며들지 못한 물감 위에 화장지를 얹거나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물감을 더욱 묽게 하는 방식으로 물감을 뺀다(-)”고 덧붙였다.

정 화백은 이제 예술의 마라톤에서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인기 작가보다는 ‘멋진 작가’로 남고 싶다는 그는 “유행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나만의 세계를 우직하게 구축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고 했다. 정 화백은 자카르타 전시가 끝나는 대로 내년 3월에는 인도네시아 최대 와인유통그룹 더픽의 에디수기리 회장 초청으로 반둥 수나리오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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