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요뉴스 한국경제TV에서 선정한 지난 주요뉴스 뉴스썸 한국경제TV 웹사이트에서 접속자들이 많이 본 뉴스 한국경제TV 기사만 onoff
박희권 前 주스페인 대사 "구한말 같은 2020 한국, 협상력 높여야 할 때" 2020-08-30 17:13:54
보복이 뒤따른다”며 “정부는 스스로를 서희(고려시대 외교 협상가)로 칭할 게 아니라 수많은 서희를 조용히 육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결과를 두고 고려시대 문관 서희가 거란으로부터 강동6주를 받아낸 외교 담판에 빗대어 “꿀릴 것 없는 협상판”이...
무역국가로 성공한 고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7-05 08:00:09
내용이다. 심지어는 고려의 교활한 상인들이 조공을 핑계로 자주 들어와 소란하게 만들었고, 중국에서도 간사한 무리들이 고려로 간다고 하면서 적국인 거란과 통한다는 등의 말까지 했다. 그만큼 교류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렇게 무역활동에 적극적인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송나라와 무역을 계속했다....
미래를 내다본 통일 군주 왕건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6-28 08:27:01
왕건은 신흥국인 고려의 정체성과 사상, 그리고 미래의 국가발전 정책까지 해결하려는 지도자였다. 북쪽에서 동족인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취약한 국력의 운명을 걸고 군사적인 능력이 검증된 요나라와 직접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발해를 구하는 모험을...
후삼국 통일전쟁 뛰어든 후백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6-21 08:00:01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에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 후백제는 927년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했다. 또 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겼다. 그 후...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틴 발해…復國운동 200년간 이어져 2020-04-17 17:04:58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대분열 시대는 모든 국가와 인물들에게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위기이며 성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2020-04-03 17:11:31
및 거란과 같다’고 했고,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고 썼다. 중국은 ‘별종’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족이라는 듯 주장하지만, ‘고려(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高麗本夫餘別種也)’나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夫餘別種也)’...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동남아·티베트·일본…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백제 유민 2020-03-27 17:39:39
많았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지금도 ‘다구르족’ 같은 일부 민족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데, 그 시대의 상황과 일부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변방국가서 승자 된 신라…비결은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 2020-02-28 17:47:29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략적인 거점들을 단계적으로 확보하는 전쟁을 추진했다. 그리고 ‘마립간(칸)’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법흥왕 때부터는 ‘대왕(태왕)’으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 이어 골품제를 실시하고, 관부를 설치하며, 군사조직을 개편했다.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연대성이 강한 불교를...
고려 수도인 개경은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죠…고려는 귀족·관료·중앙군 등 국인과 지방 향인 차별 2019-09-23 09:00:29
특유의 법이었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으로부터 많은 외침을 당하고서도 자력으로 물리치거나 강인하게 저항한 것은 그 국가체제가 3만 명의 중앙군으로 이뤄진 군사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이 같은 고려왕조의 국가체제를 많이 왜곡했다. 고려는 조선과 같은 선비의...
토지는 왕실의 공전과 귀족의 사전으로 나뉘었지요…11세기 말엔 모두 공전으로…관리는 토지 아닌 녹봉 받아 2019-09-09 09:00:27
전시를 받았다. 거란과의 전쟁 고려의 집권체제는 성종(981~997)과 현종(1009~1031) 연간에 크게 정비됐다. 거란과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 그 배경이었다. 성종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주현(州縣)에 수령을 파견했다. 그러고선 호족이 보유한 군사력을 주현군(州縣軍)이란 이름의 지방군으로 편성해 수령의 통제 아래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