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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기억] ⑩'보수의 변신'에 인적교류 확대…"스파이?" 상호불신 줄어 2019-06-23 08:05:02
서독인들의 동독 여행이 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서독인들의 요구가 뒷받침돼 있다. 동독 여행에 대한 서독인들의 욕구가 높은 점이 동서독 협상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론조사 기관 알렌스바흐연구소의 1972년 2월 여론조사 결과,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사항'에...
[column of the week] 달러가 왕좌에서 내려오는 날 2019-06-13 17:01:08
미군들은 서독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다.많은 사람이 “달러가 휴지가 될 것이다”는 말은 이미 이전에도 많이 들어봤다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사실이다. 1970년대부터 이미 달러화가 가진 최고 통화 자리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달러는 모든 곳에서 그대로 많이 쓰인다. 달러...
[서독의 기억] ⑧'성과없어도 정상회담 좋다' 분단 벽앞 총리도 시민도 냉철 2019-03-30 09:01:00
좌우 시위대 간에 물리적 충돌도 있었지만, 서독인들은 대체로 차분했다. ◇ 정상회담에 들뜬 동서독 시민, 브란트는 무표정·자제 요청 브란트 총리는 1970년 3월 동독 에어푸르트에서의 1차 정상회담장에 가는 길부터 표정 관리를 했다. 브란트 총리는 에어푸르트로 가는 특별열차에서 취재진에게 "국민은 수상이 인...
[서독의 기억]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2019-03-29 07:01:01
부정해오다가 1961년 11월 기습적으로 장벽을 세워 서독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동독과의 대화에 대한 저항감과 회의감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런 정서는 카셀 정상회담에서의 우파 시위에 반영이 돼 있다. 그렇지만, 우파의 대(對)동독 정책의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68 학생운동'을 위시한 서독 내...
[서독의 기억] ⑤"南, 시민 北방문자유 허용해야"…15년 獨통일硏소장의 조언 2019-01-25 09:00:08
중 하나로, 동독체제가 서독인들의 생각 이상으로 굳건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까지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백안시했습니다. 소련의 꼭두각시로 치부했어요. 그래서 동독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허수아비 정권이라고 생각했던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서독의 기억] ③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2019-01-23 09:30:04
5만4천여 개의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하고 서독인들의 여행 규제를 완화했다. 다만, 동독 측은 차관의 대가라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물론 서독 정부의 차관 제공에 대해 서독 내에서는 반(反)인권적인 동독 정부의 생명을 연장해준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동서독 인적 교류를 확대해 양측에서...
[서독의 기억] ②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2019-01-22 10:00:18
꼼수'였다. 1986년 1월부터 5월까지 서독인들이 교통위반으로 부과받은 벌금 건수는 6만2천 건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29일자 주간지 디 차이트가 '동독, 값비싼 규칙 위반'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내용이다. 또,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들은 하루에 25마르크를 동독 마르크로 환전해야 했는데, 쓰고...
[서독의 기억] ①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2019-01-21 10:00:12
교류·협력 지지한 서독인들 풀릴 것만 같지 않았던 보수와 진보 간의 대립이 완화된 데에는 서독인들의 여론이 작용했다. 1972년 12월 총선에서 브란트 총리와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이 다시 승리한 직후,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가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찾아본 결과 이런 경향성이 두드러졌다....
킹 목사 암살 50주기 '분단' 독일의 특별한 기억…"우린 하나다" 2018-04-03 17:09:33
서독인들은 아버지 세대의 나치 전통 대신 (미국의) 히피, 저항, 시민불복종 문화와 연결되길 기대했다"고 킹 목사를 희구하는 서독인들의 정향을 해설했다. 동독인들은 또한 젊은층을 중심으로 킹 목사의 저항과 미 당국의 탄압을 1953년 자신들의 공산정권에 맞선 노동자 저항과 탄압에 빗대며 같은 정서를 느꼈다는 것이...
나치즘이 계속 고개를 드는 시대…대응할 방법은 2017-08-22 16:05:21
다수의 서독인은 역사의 페이지를 얼른 넘겨버리고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어 했다. 책임은 히틀러에게 전가됐다. 1970년대에 와서야 독일은 역사교육에서 나치의 실상을 전면에 드러냈다.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가 2006년에야 자신의 나치 친위대 복무 경력을 밝힌 것도 역사와 대면을 꺼렸던 독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