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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의 시선] 아무도 사랑하지 마라 2022-06-23 17:09:22
7월 19일, 임오군란이 터졌다. 반란군에 빈민들이 합류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아수라장 속에서 괴이한 광경이 나타나는데, ‘무당’들이 우두국(牛痘局)들을 공격하고 불 지른 것이 그것이다. 당시 지석영이 보급한 종두법은 천연두 예방에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무당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인 ‘마마귀신’을 빼앗아간...
용산 풍수설, 아니면 말고식 괴담인가 [여기는 논설실] 2022-03-28 09:01:29
땐 왜군이, 임오군란 땐 청나라가 지휘소로 이용했다. 청·일 전쟁 이후 1945년 해방때까지 일본군이 전초기지로 삼았다. 해방 뒤엔 미군 시대가 열렸다. 용산을 청와대 이전 후보지로 꼽은 것은 윤 당선인 만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이자 절친인 건축가 승효상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국방부를 외곽으로...
이재오 "윤석열 용산 간다는 건 누가 봐도 풍수지리설 때문" 2022-03-18 09:16:49
그는 “1882년에 임오군란 때부터 일본군의 공관 수비대가 용산에 주둔하면서 그때부터 시작해서 조선군 주차사령부, 일본군 전시사령부,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다)”며 “용산 일대는 정말로 대통령이 가면 안 될 자리”라고 주장했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측에서도 지적된 내용이다.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7일...
20년 만에 인천 대표하는 도시와 120년 된 맛집[이송렬의 맛동산] 2022-01-08 07:25:08
송도에도 들어왔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합니다. 이때 약 40여명의 군역상인이 함께 인천으로 들어오면서 화교들이 공식적으로 국내에 들어옵니다. 이듬해 통상조약이 체결돼 화교유입이 활발해졌고, 인천공원 인근 북성동 일대에 화교 거주지가 형성됩니다. 이곳은...
경기광주시, 한양 삼십리길 '수능과 취직시험 합격기원 명소로 육성' 2021-04-30 15:39:39
아름다운 역사탐방 구간이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당시 여주로 피신하던 길에 하룻밤을 묵었다고 전해지는 새오고개 돌탑이 있고 마을을 지키는 장승과 오전리 마을 전경 등을 볼 수 있다. 불당리∼검복리 구간(2.67㎞)은 마을길이 아름다운 산책코스로 족두리 모양의 바위와 익살스러운 표정의 불당리 장승이 있다. 널...
미완의 혁명…정당한 평가 받지 못한 갑신정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4-04 08:09:41
7월에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에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혼란의 조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3-28 05:30:01
외교사』수록 논문). 임오군란의 배경과 평가를 놓고 명성황후 세력의 부패라는 책임 전가론이 있으나 세도정치나 대원군 시대에도 부패상황은 심각했으며, 군도 부패하고 무책임한 집단이었다. 결국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조선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을 좌절시켰다. 또한 청일...
간도를 둘러싼 조선과 청나라의 갈등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2-14 09:12:50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와 척족세력들의 요구를 빌미로 청나라는 군대를 파병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속방체제로 구축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간도의 조선인을 1년 이내에 송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실수였다. 다음해 청나라가 간도의 조선인을 소환하라고 다시 요구하자 조선은 개혁파이자...
'선녀들' 흥선대원군vs고종 특집, 흥미진진 몰입도 '시청률 수직 상승' 2020-09-14 09:23:00
‘임오군란’이 발발한 것이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흥선대원군은 도망친 명성황후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국장을 준비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해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였다고. 설민석은 “그 때 고종이 아버지와 의절을 결심한 게 아닐까”라며,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화제 집중' 용산…이태원과 철도정비창 [여기는 논설실] 2020-05-12 10:53:38
당시 왜군들이 이곳에 주둔했고, 1882년 임오군란 후 청나라 군대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이 청나라 주둔지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04년 일본의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들어선 뒤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광복 직후 미군이 잠시 주둔했다가 철수했고, 6·25전쟁을 계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