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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건순의 제자백가] 우리 역사에 있었던 두 번의 쇄국시대 2021-12-06 17:28:45
수입하고 배우려 했는데,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4개조 개혁안을 내걸었을 때 대원군 송환을 가장 맨 위에 올려놓은 것도 이유가 있다. 소위 코드가 맞았기 때문인데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을 가장 예뻐했던 사람도 대원군이었다. 대원군과 개화파의 관계만 봐도 ‘쇄국의 아이콘 흥선대원군’이라는 인식은...
안철수 "중국 사대 정권인가"…국적법 개정 강행 비판 2021-05-31 13:24:44
"국적법 개정까지 이뤄진다면 문재인 정권은 한중관계를 갑신정변 직후 예속관계로 되돌린 굴욕적인 '중국 사대 정권'이라는 역사의 평가와 비판을 결코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법무부가 지난달 26일 입법예고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은 한국 영주권을 지닌 외국인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법...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혁명, 동학농민혁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4-11 07:05:46
소개됐고, 갑신정변으로 실패한 개혁의지와 민권사상을 일반 백성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재발견했고, 그 요구를 원(原)정체성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와 연결해 정신과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외세의 실체를 생활 속에서 자각했으며, 저항과 타도의 대상으로 각인시켜 의병투쟁, 독립전쟁 등으로 계승됐다....
미완의 혁명…정당한 평가 받지 못한 갑신정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4-04 08:09:41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 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의...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혼란의 조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3-28 05:30:01
참여한 신진 세력들이다. 훗날 갑신정변을 비롯해 개화를 주도한 서광범·박영효·김옥균·김홍집 등 젊은 청년은 북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지도자였던 오경석·유대치 등은 역관 출신이었고, 정신적인 지주인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임오군란 이후 정책 차이로 인해 사대당(수구당)인 온건...
간도를 둘러싼 조선과 청나라의 갈등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1-02-14 09:12:50
등을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후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4번에 걸쳐 제1차...
‘차이나는 클라스’, 대한민국 최초 왕립 병원 '광혜원'…그 시작은? 2020-12-24 17:41:00
의사 앨런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앨런은 갑신정변에서 자객의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친척 민영익의 봉합수술을 집도해 그를 살렸다. 이에 고종 황제가 크게 감격하여 앨런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하였는데, 앨런은 소원은 ‘한국 백성들과 황제를 위해 병원을 세우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탄생...
[책마을] 장지연·서재필 등 구한말 지식인들의 名文 2020-01-16 14:54:52
비롯해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큰 ‘사건’들이 잇달았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쇄신에 힘쓰지만 결국 을사늑약을 거쳐 국권을 피탈당한다. 이 시기를 겪은 당대 지식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국 산문선》은 외세 침략으로 시작된 격동의 시대에 조선...
조선과 일본 역사 바꾼 흥선과 후쿠자와…쇄국정책과 개방정책이 나라의 운명 갈라 2019-06-03 09:00:06
사상은 메이지 유신은 물론 조선의 갑신정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며 스승으로 모셨고,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걸로 봐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내부의 닫힌 문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나...
[다시 읽는 명저] "自强과 동맹강화가 한반도 안전 수호" 2019-05-08 18:01:43
망국(亡國)의 비운을 맞았다.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청일전쟁(1894년), 아관파천(1896년), 러일전쟁(1904~1905년) 등을 거치면서 중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며 줄대기 외교만 하다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다. 오락가락하는 외교 탓에 제대로 된 동맹국도 만들지 못했다. “힘이 약하면서 명분이나 이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