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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원정 배경과 고려의 패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8-16 08:08:40
교섭부터 사신단을 몰살시키는 등 현실을 무시한 정책들을 폈다. 이에 막부정권의 자존심과 국제 감각의 무지로 인해 참전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물론 일본은 변방의 섬나라이고, 외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나라의 상인들이 혼슈 중부인 쓰루가의 객관에 머물렀을(《후꾸이(福井)현사》)정도이니, 무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한 까닭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8-09 08:00:24
일본의 막부는 사신단들을 계속 참수시켰다. 뒤늦게 실상을 파악한 쿠빌라이칸은 1276년에 남송을 멸망시키자 준비를 했고, 1280년 8월에 일본을 재차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원나라의 정책과 적극적인 참여로 입장을 바꾼 쿠빌라이의 사위인 충렬왕의 협조로 결국은 연합군이 편성됐다. 동로군은 군사 2만명, 뱃사공·선원...
해양의 나라 고려…무역대국·외교강국 이뤄[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7-19 08:00:02
말년인 1122년에 고려에 사신단으로 온 서긍(徐兢)은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라는 책의 주즙(舟楫)편에서 고려의 배를 순(시)선, 관(용)선, 소나무로 튼튼하게 만든 커다란 송방, 일종의 누선인 막선 등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조선술이 보잘것없다는 표현으로 기술했다. 정말 그럴까? 해양의 나라 고려는 500년 역사에서...
고려의 등거리 외교 성공비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7-12 08:00:02
주장도 나왔다. 이후 송나라는 고려 사신단을 금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하여 몇 년 동안 방문을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끝까지 송과 금나라의 충돌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등거리 외교로 평화와 이익을 챙겼다. 고려는 일본과도 교섭을 벌여 통일한 직후인 937년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무역국가로 성공한 고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7-05 08:00:09
설치했다. 그 시대에는 국가가 사신단 등을 활용해 무역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역사 속에 잊힌 이정기와 제나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2020-06-07 09:50:20
사신단들과 승려, 유학생들도 산둥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에는 사료에 나타나듯이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물론이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들도 거주하였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데 필요한 우호집단들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뿐만이 아니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범신라인 공동체, 동아시아 물류망 장악하다 2020-05-17 11:36:31
파견한 김태렴이 이끄는 사신단은 700명의 인원이 7척의 배로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한 셈이다. 839년의 기록에는 ‘신라선이 풍파에 강하다.’고 했고, 840년의 기록을 보면 대재부가 신라배를 6척이나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상인이나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단조차도 신라배를 활용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무역의 나라 신라…실크로드의 출발과 종착점 경주 2020-05-10 15:47:15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사신단은 공무역까지 겸했으므로 인원들이 많았다. 752년에 나라(奈良)에서 도다이사(東大寺)가 완성됐을 때 왕자인 김태렴(金泰廉)은 7척의 배에 700명이라는 대사절단을 이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 반은 수도인 헤이코죠(平城京)와 외항인 나니와(오사까 지방)에서 무역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틴 발해…復國운동 200년간 이어져 2020-04-17 17:04:58
받들게 했다. 또 거란의 사신단이 942년에 50필의 낙타를 몰고 왔을 때 교류를 거절하면서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 심지어 후진과 동맹을 맺고 거란 공격을 시도했다. 한 집단과 구성원이 역사의 기로에서 선택한 것을 두고 후대인이 무책임하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발해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동아지중해 누비며 무역 강국 자리매김 2020-04-10 17:04:44
온 사신단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대금은 무려 40만전(錢)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발해악(樂) 등 각종 문화가 일본에 전파됐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심각한 무역 역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발해 사신단 활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초에는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