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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서구문물 수용후 급성장한 일본, 전쟁으로 야망 분출…수차례 침략 의도에도 조선 조정 방어준비 게을리해 2022-06-27 10:00:43
끝에 도요토미를 만나고 귀국한 사신단은 귀국하는 도중 답변서를 받았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로 칭한 답변서에는 대명국에 들어가 정복하고 다스릴 것이며, 그때 조선이 군사행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도 조정은 방어 준비를 게을리했다. 1592년 음력 4월. 도요토미는 20만 명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태풍에 대패로 끝난 쿠빌라이칸의 일본 정벌…동원된 고려에선 친원파 득세하며 몽골풍 만연 2022-01-17 10:00:32
교섭부터 사신단을 몰살시키는 등 현실을 무시한 정책들을 폈다. 물론 일본은 변방의 섬나라이고, 외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나라의 상인들이 혼슈 중부인 쓰루가의 객관에 머물렀을 정도이니, 무역은 물론이고 국제질서 또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일본은 내부 문제로 인해 전략적인 선택을...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2022-01-10 10:00:04
보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막부는 사신단을 계속 참수시켰다. 뒤늦게 실상을 파악한 쿠빌라이칸은 1276년 남송을 멸망시키자 이내 준비했고, 1280년 8월에 일본을 재차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원나라의 정책과 적극적인 참여로 입장을 바꾼 쿠빌라이의 사위인 충렬왕의 협조로 결국은 연합군이 편성됐다. 동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양강국 고려의 밑거름 된 뛰어난 조선기술…'거북선의 원조' 과선으로 여진 해적 물리져 2021-12-06 10:00:48
한 예를 들면 서긍이 속했던 송나라의 사신단은 주력선인 2척의 신주와 보좌선인 6척의 객주로 구성됐다. 그런데 객주는 길이가 30m, 높이가 9m 폭이 7.5m이고, 주 돛은 높이가 30m에 달한다. 곡식 2000섬(1섬은 10말)을 실을 수 있었고, 신주는 그 3배에 달하는 거함이었다. 그런데 인도양을 지나 페르시아만을 왕복하는...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2021-11-22 09:02:22
유명한 국제도시였다. 1123년에 사신단으로 온 송나라의 서긍은 한 달간 머물면서 자료를 모아 귀국한 뒤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사신선들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즉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저자를 만들고는, 온갖 물건을 진열했다. 또 해안에는 1만여 명의 사람이...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서지역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당 혼란기에 산둥반도 장악…제나라 건국으로 이어져 2021-10-18 09:00:53
사신단들과 승려, 유학생들도 산둥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에는 사료에 나타나듯이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물론이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들도 거주하였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데 필요한 우호집단들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뿐만이 아니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범신라인들이 구축한 해안경제 벨트·동아시아 물류망, 경제특구·일대일로 등 중국 개방경제의 '모범'이었다 2021-09-06 09:00:28
파견한 김태렴이 이끄는 사신단은 700명의 인원이 7척의 배로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한 셈이다. 839년의 기록에는 ‘신라선이 풍파에 강하다’고 했고, 840년의 기록을 보면 대재부가 신라배를 6척이나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상인이나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단조차도 신라배를 활용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삼국통일 전쟁의 후유증…일본과 적대관계, 잦은 해적 약탈에도 신라·日 무역 꾸준히 증가 2021-08-23 09:00:28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일본의 신라정토론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신라는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감정적으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초기부터 갈등관계가 있었지만, 결국 8세기 중반 무렵에는 국교가 단절됐다.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도 고조됐다. 일본은 소위 ‘신라정토론’으로 알려진 정책을 추진했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시아 무역의 시대 '물류 허브'였던 신라…서·중앙아시아 잇는 실크로드 출발·종착점 2021-08-16 09:00:16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사신단은 공무역까지 겸했으므로 인원이 많았다. 752년에 나라(奈良)에서 도다이사(東大寺)가 완성됐을 때 왕자인 김태렴(金泰廉)은 7척의 배에 700명이라는 대사절단을 이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 반은 수도인 헤이코조(平城京)와 외항인 나니와(오사카 지방)에서 무역했고,...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2021-07-12 09:01:02
받들게 했다. 또 거란의 사신단이 942년에 50필의 낙타를 몰고 왔을 때 교류를 거절하면서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 심지어 후진과 동맹을 맺고 거란 공격을 시도했다. 한 집단과 구성원이 역사의 기로에서 선택한 것을 두고 후대인이 무책임하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발해의...